학벌 카스트’에 ‘외모 카스트’까지 존재하는 한국 땅에서 여성으로서 자기 일을 찾아 사회적 성취감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언젠가 한 주간지의 여성 편집국장은 “여자다운 성공이 어떤 방법일지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 모델들이 나와 주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요즘, 진로를 두고 고민하는 이들, 특히 여성들을 위해 이번 라운지에는 세 명의 사회 선배들을 초대했다.
분장 디자이너 구유진, 헤어 디자이너 김수진, 무역업자 강은경. 지금은 하나 같이 자기 매장과 스튜디오와 회사와 꾸려 가는 ‘젊은 여사장’들이지만 사회가 처음부터 이들에게 호락호락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도 한때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 때문에 울어야 했고 자신이 잘 하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기도 했다.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자기 한계 앞에서 좌절해야 했고 남들 다 가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하지 못해 홀로 아파해야 했다. 정말 뜻대로 되지 않고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첫 번째 꿈이 좌절되자, 이들은 열등감을 안고 차선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차선의 길에서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치유와 회복과 비전을 주셨고 결국 차선은 최선이 되었다. 빛소 라운지에서 이들이 나눈 삶의 이야기를 통해 진로에 대한 작은 지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첫 만남
구유진
분장 디자이너. S·F MAKE UP 대표
마흔 두 살
서로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마감을 코앞에 두고서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사전 통화에서 유일하게 모임 장소를 잘 알고 있던 김수진 씨가 먼저 나타났다. 곧이어 아담한 체구에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구유진 씨가 도착했고 달콤한 커피향이 테이블에 감돌 무렵, 차분한 분위기의 강은경 씨가 들어섰다.
#2. 내가 걸어온 길
구유진: 저는 무용을 전공했는데 대학교 때 분장 예술 쪽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어려서부터 쭉 무용을 했으니까 당연히 그 길을 가리라 생각했는데 키가 작아서 포기해야 했죠. 뭐 내가 이렇게 크지 않을 줄 알았나.(웃음) 우여곡절 끝에 재수해서 경희대 무용과에 정말 은혜로 합격했어요. 그러나 무용과에 진학해도 신체의 콤플렉스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죠.
그러다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 보려고 들어갔던 연극반에서 분장 예술 분야를 접하게 되었어요. 당시엔 이 분야를 어디서 따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책을 보며 독학했죠. 그러다 정말 이걸 해야겠다 싶어서 대가에게 배우기로 결심하고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근데 여자라서 안 된대요. 밤샘도 하고 짐도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데 여자는 힘도 없고 스캔들이 날 수도 있고 또 결혼하면 그만 둬야 하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 하고 겨우 허락을 받고 시작했어요. 그 후 15년 동안 사사했는데 정말 열심히 했어요. 분장 디자이너로 다양한 무대에 참여하다가 지금은 1년에 한 번씩 스태프를 뽑아서 가르치고 있어요. 간간이 강의도 나가고 있고요.
김수진
헤어 디자이너. 이촌동 쟈끄데상쥬 운영
서른 살
김수진: 어려서부터 저는 스튜어디스가 꿈이었어요. 그런데 대학 진학에 실패했어요. 공부도 괜찮게 했는데 이해할 수 없었죠. 방황하다가 뭐 좀 배워볼까 싶어서 미용을 시작했어요. 근데 환경도 열악하고 대접도 못 받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너무 힘들었어요.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대학 시험을 봤는데 또 떨어졌어요. 할 수 없이 미용실로 돌아와서 다시 시작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더니 디자이너를 시켜 주시더라고요. 그러다가 쟈끄데상쥬로 옮기면서 좋은 사장님을 만났고 지금은 동료와 함께 지점을 오픈했어요. 미용실에서 일하면서도 계속 공부해 대학에서 경영학을 마치고 대학원에서 특수 예술을 공부했어요. 정말 많은 걸 배웠고 시야가 넓어졌어요.
저는 정말 떨어지는 인생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모두가 잘 된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길을 열어 주신 거죠. 원래 ‘혼자 멋지게 살자’가 제 신조였는데 지금은 낯을 못 들 정도로 모든 걸 바꿔 놓으셨어요. 그런데 자기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저는 아직도 기도하자고 하면 딴 생각하고 예배 시간에 졸기도 하지만 언젠가 선교지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갔다 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이 생겨요.
강은경: 서로 공통점이 있네요. 어려움을 통해 길을 틀었는데 오히려 그 길이 축복이 된 거죠. 저는 원래 꿈이 현모양처였어요. 진짜예요. 남편 잘 돕고 밥하고 아이 키우고. 근데 그 평범한 것이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웃음) 대학 졸업 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녔어요. 그러다가 결혼할까 하고 교회에 나간 거예요. 교회에서 임원을 하게 되면서 직장을 그만 두었다가 다시 외국인 회사에 비서로 취직했어요.
그러면서 고민을 했죠. 나이는 들어가고 결혼의 길은 보이지 않고 먹고는 살아야겠고…. 내가 뭘 잘 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전에 했던 일 가운데 제일 재미있었던 음반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거예요. 외국에서 음반을 수입해서 유통하는 건데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거든요. 제가 사업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무식이 용감이라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섰어요. 걸음을 내딛으면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 같아요. 지난해 매출만 해도 1억 원이 넘었어요.
회사 이름이 ‘시샵(C#)뮤직’인데 ‘그리스도를 올려드린다’는 뜻이에요. 이 일을 통해 선교사가 직접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에 선교 베이스를 만드는 것이 꿈이에요. 작은 구멍 가게라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 준비된 자여, 인내하라
강은경
무역업. 시샵뮤직(C#) 실장
서른 여덟 살
강은경: 직장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준비하라는 거예요. 기회는 분명 계속 오거든요. 저는 내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몰라서 헤맨 경우예요. 문과 학생들이 아마 대부분 그럴 거예요. 취직했다가 결혼하고 그만 두는 경우가 많죠. 그러지 말고 선배들 얘기도 많이 들어보고 어떤 것이 나에게 맞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기 길을 준비하면 좋겠어요.
제가 사람을 뽑는 입장이 되니까 참 안타까워요. 시샵뮤직이라고 거창하게 간판을 내걸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네 번 뽑고 포기했어요. 저희 회사에서는 운전도 하고 음악도 알고 외국어도 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크리스천들이 없더라고요. 크리스천들이 좀더 부지런하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능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눈을 낮출 필요가 있어요. 작은 것부터 배우는 마음으로 시작해야지요.
김수진: 저에게 헤어 디자이너는 차선책이었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했고 즐겁게 일했어요. 차선의 선택이지만 그 일을 좋아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 사람 인생은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늘 차선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그 사람 인생도 차선일 수밖에 없죠.
구유진: 예전에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자들을 지켜보면 재능이 있다 싶은 사람은 다 떠난다고요. 그만큼 재능이 있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다는 얘기예요. 어떤 분야든지 10년 이상을 해야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어요. 마라톤을 하는 선수처럼 일단 목표를 정하고 인내하며 끝까지 가라고 권하고 싶어요. 테크닉이나 에너지를 미리 준비하고 실전에서는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달리는 거죠. 때로 물을 마시거나 걸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쉬면 안 되죠. 요즘 학생들을 보면 참 인내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유행을 좇듯이 진로를 결정해요. 그러나 무슨 일이든 동전의 양면처럼 쉬운 면과 어려운 면이 같이 있어요.
‘여자가 배워서 뭐 하냐’는 식의 유교적 사고 방식의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저는 남자한테 지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그러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했죠. 저에게 무용이 먹기만 하면 되는 차려진 밥상 같았다면 분장은 달랐어요. 직접 재료를 사다가 만들어서 먹듯이 공부해야 했어요. 누가 갖다 주거나 먹여주지 않았어요. 미래를 내다보며 필요한 것을 계속 배워야 해요.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해요. 경쟁력은 나만 잘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데리고 있는 스태프의 수준이 올라가야 생기는 거예요.
#4. 꿈꾸는 자여, 함께 가라
김수진: 저도 스무 살 때는 조그만 학원에서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보니 남들이 잘한다고 아무리 칭찬을 해도 자신의 한계를 알겠어요. 늘 배우는 것도 중요한데 때론 푹 쉬면서 재충전할 필요도 있다고 봐요. 그리고 정말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어요. 뜻하지 않게 주변의 도움을 참 많이 받거든요. 인맥은 재산인 것 같아요.
인내력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선 순위 문제예요. 어느 교수님이 큰 주전자에 자갈을 가득 채우고 학생들에게 “다 찼냐”고 물었더니 “다 찼다”고 대답 했어요. 그랬더니 그 주전자에 조약돌을, 다음엔 모레를, 마지막으로 물을 넣었어요. 느낀 바를 말하라고 하니까 어떤 학생이 자신 있게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 해도 쪼개고 쪼개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느꼈다”고 했어요. 그러나 교수의 대답은 달랐어요. 큰돌부터 넣었기 때문에 이 많은 것이 들어간 거지 물부터 채웠거나 모레부터 넣었다면 결코 큰돌을 넣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거예요. 우선 순위를 말한 거죠. 내가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강은경: 마지막으로 꿈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꿈이 있으면 준비하면서 기다리세요. 이루어져요. 그리고 카리스마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어떤 분야에 최고인 사람이 그 분야에 큰 영향력을 미치잖아요.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살면 좋겠어요.
그들은 거창한 성공을 꿈꾸며 사회에 뛰어들지 않았다. 다만 성실하게 인내하며 걸었을 뿐이었다. 그들과 헤어지는 길에 어느덧 입가에 맴도는 찬양이 있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날 위해 일하시네….”
송도숙 기자mailto:white74@tyrannus.co.kr
|
|
CONTENT US
작성자 : sfmake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