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 1996/5
내 이름과 분장의 명에를 걸고 발표회를 갖는다
우리는 무대에서 제일 먼저 배우를 본다. 그리고 그 배우의 외형만으로 귀족인지,
천민인지, 악역인지, 주역인지 대강 짐작을 하게 된다. 배우의 성격창조를 마지막에
완성하는 것은 바로 분장. 완벿한 분장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인지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분장사 구유진. 그는 바로 국내에 몇 안되는 수준급 무대 분장사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밀려드는 일감에 쫓기던 그가 일을 하나 단단히 터트렸다. 4월
18, 19일 이틀간 예술의 전당에서 <구유진의 분장 이야기>라는 발표회를 계획한 것.
분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극, 무용, 오페라 등 24편의 작품을 모았고, 출연진만 40
여명 등장하는 대규모 순수예술 분장 발표회이다.
“분장도 하나의 예술분야로 당당히 인정받아야겠다 싶어 이런 행사를 기획했어요.
완성도 높은 분장은 공연의 질을 높이는데 아주 큰 몫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분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해 늘 안타까웠어요. 이번 행사를 통해 분장과 분장
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합니다.”
분장사로서 사명감을 갖고 발표회를 준비했다는 그의 본래 전공은 무용이다. 경희
대 무용과를 다니던 시절, 대학연극반에 들어가 활동한 것이 분장과 처음 맺은 인연.
선배가 툭 던져준 분장책 한권을 10여번 정독하며 독학하다가 좀더 본격적으로 분장
을 배우고 싶어 분장의 대부인 전예출선생 밑으로 들어갔다. 5년 정도의 고된 수련기
간 때문에 여자는 받지 않겠다는 스승한테 끝까지 매달려 겨우 제자가 될 수 있었고,
욕심많은 그는 그후에도 분장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일본, 미국 등 외국도 마다않으며,
해부학, 컴퓨터그래픽 등 관련분야까지 모두 섭렵하며 분장의 이론과 실기를 익혀나
갔다.
분장에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부지런히 배우고 다닌 덕에 그는 신뢰받는 분장사로
점점 인정받게 됐다. 어느새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팀원도 7명이나 있으니 16년
간 한우물을 판 보람도 있었다. 그의 장점은 무엇보다 작품 분석을 정확히 해낸다는
것. 무용, 연극 등 자신이 무대에 선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영상매체 보
다는 무대예술에 더 애정을 쏟는데, 무대예술이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하기에 좋은
분야이다. 어떤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그의 결벽증 또한 장점이라고 할밖에. 작품 준
비기간에는 일절 술을 사양하고, 공연이 끝나면 으레 갖는 뒷풀이를 매정하게 거절하
고 팀원들과 바로 평가회를 갖기로 유명하다. ‘서로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자’라는 조
건 아래 연극을 하는 남편(최성웅, 극단 세미 대표)과 결혼해 아들 하나가 있는데, 발
표회 준비 때문에 얼굴 못본지가 여러날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욕심 많고 까다로운 전문직업여성으로만 지레 짐작하면 곤란하다. 그
는 자신의 일에는 철저하게 몰두하지만 마음은 열려있는 호탕한 여성이었다. 주로 밀
실에서만 이뤄줬던 분장 작업을 과감하게 열어놓고 누구에게든 자신의 노하우를 전달
해주는데, 어렵게 독학했던 자신의 시행착오를 후배들에게는 겪지 않게 하고싶기 때
문이라고. 그래서인지 그의 팀은 호흡이 무척 잘 맞는데, 요즘은 4개월째 모두들 밤샘
작업을 하느라 꽤 수척해 보였다.
분장사의 필수 조건을 그는 ‘인내심’, ‘지구력’, 창의력‘이라고 꼽는다. 또한 한사람
의 예술가라는 ‘자존심’까지. 그의 이름을 내걸고 마련한 분장 발표회가 분장을 당당
한 예술로 자리매김해주고, 분장을 도전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자존심을 확인하는 계
기가 됐으면 한다.
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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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sfmake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