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bskah 2002/8
천(千)의 얼굴을 창조하는 여자
지난 월든컵 기간 내내 페이스페인팅이 경기장 뿐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 넘쳐났다. 형형색색의 얼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가슴 속에있는 기쁨이나 변화에의 희망이 그렇게 물감으로 피어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봉선화를 손톰에 물들이던 추억에서 첫 직장출근하던 날 떨리는 마스카라의 기억까지, 그렇게 얼굴이나 우리 몸 어딘가에 색을 입히고 변화를 주는 일은 단지 외형적인 이미지 변신 뿐 아니라 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얼굴을 만나는 일이다. 국내 최고의 분장사 중 한 사람인 구유진은 그런 변화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분장은 인물을 완성하는 작업
SF make up. 서울 북가좌동에 위치한 구유진 분장 스튜디오의 이름이다. ‘공상과학 영화 분장을 한다는 얘긴가?’ 예의 그 소녀같은 웃음을 띠고 나타난 그에게 먼저 그 뜻을 물었다. “아, 그거요, 'Stage Face'라는 뜻이에요. 뷰티 메이크업과 구별하기위해서 정한 이름인데 영화 특수 분장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이 꽤있어요. 호호” 무대 분장. 그렇다면 그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공연예술가들인 셈이다. 흔히 종합예술이라고 말하는 무대예술. 그는 대본을 통해서 잉태된 연기자와 관객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말인 ‘분장사’보다는 ‘MAKEUP DESIGNER'라고 해야 얼굴에 화장하는 것을 포함한 포괄적인 인물 창조작업을 설명해 준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메이크업 디자이너의 도움이 없다면 뮤지컬 <캣츠>에서 사람보다 더 인간적인 고양이나 <파우스트>의 그로테스크한 메페스토펠레스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무대 위의 인물이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구축되기 시작한 독특한 캐릭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창조 작품이다. 분장사는 의상이나 조명과 함께 그 인물을 ‘만들어내는’ 창조 작업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즐겁다고 하는 그에게 더 관심이 간다. 어떻게 그런 일에 뛰어든 걸까? 구유진의 화장기 없는 얼굴 속엔 어떤 과거의 얼굴들이 숨어 있는 걸까.
결단, 인생 두 번째의 길에서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침 햇살이 에센스처럼 찻잔 손잡이에스며드는 창가 사무실에서 그는 처음으로 평탄한 삶을 뒤로하고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던 대학시절 얘기를 들려주었다.
무용. 그는 선화예고와 경희대에서 춤을 배우던 예비 무용인이었다. 혼자 작품을 안무해서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딱 부러졌던 그.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160도 안 되는 키는 당시 자꾸만 커져가는 국내 무용수들에 비해 턱없이 작았던 것. 더군다나 내성적인 그의 성격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런 콤플렉스를 고치려고 들어간 곳이 연극 동아리. 인생의 두 번째 길을 만난 곳이다. 그것에서 그는 다들 꺼려하는 스태프 중의 스태프, 분장을 맡았다. 그리고 첫 분장 작품이 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마치자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분장계의 대부, 고 전예출 선생을 찾아갔지만 ‘여자니까 안돼’라는 한마디 말로 그를 거절했다. 밤샘 작업이 다반사 인데다 무거운 짐 들고 쫓아다녀야 하는 촬영장에 여자가웬말이냐, 가르쳐봐야 결혼해서 시집가면 땡 아니냐, 라는 편견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유교적 집안의 3남 5녀 틈바구니 에서 받던 소리 없는 억압도 견디어 낸 그녀는 정말 남자들보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녀에겐 무대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분장해 줄 사람들을 이해하고있다는 프리미엄이 있었다. 결국 선생은 그를 받아들였다.
1995년 지금의 스튜디오를갖기까지 15년 세월, 구유진은 도공의 제자처럼 스승르 섬겼고 도자기를 굽듯 배우들의 얼굴에 새로운 인물을 불어넣었다. ‘예쁜 얼굴’ 만들어주는 게 분장사라는 몰지각을 몰아내고 ‘천의 얼굴’을 완성시키는 예술인으로, 또 다른 무대의 길을 걸어 왔다. 안무에도 재능이 있던 그는 졸업 직후 한때 ‘김창환 작곡에 구유진 안무면 뜬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미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국내 최초로 열린 분장 공연 <구유진의 분장 이야기>가 열리던 때, 경희대학교 김말애 교수는 “무대 위에서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던 제자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아득히 잊혀져갈 즈음갑자기 춤 속에 꼭 필요한 사람이 돼서 나타났습니다. 그 놀라움은 나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며 구유진의 성공을 축하했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춤에 대한 희망이 좌절됐을 때 누군들 아프지 않았으랴. 그란 그녀는 춤과 안무라는 자신의경험을 토대로 불모지를 개척해 나간 사람이었다. 그녀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된’(에스터 9:22) 과거의 기억을 자신의 얼굴 속에 담고 있는 예술가다.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10년, 20년을 내다보고 걸어갔으면 좋겠어요. 그 길에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 겁니다.” 라고 자신의 직업관을 펼쳐지는 그녀에겐 지금 10명 남짓의 팀이 있다. 그녀는 ‘스태프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라고 믿으며 그들과 의논하기를 쉬지 않는다. 스태프들의 작읍을 하나하나 체크해 가며 어떤 분장을 할 것인지, 그 배우의 신체 특징은 무엇인지, 작품의 배경과 맞는지 살펴간다. 한 인물이 탄생하는 산고와도 같다.
국내 유명 공연 대면 아예 기획 때부터 구유진 팀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정해진다. 발레는 물론, 뮤지컬, 연극도 마찬가지다. 98년의 한국뮤지컬 대상에서는 뮤지컬 <라이프>의 분장으로 기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직접 작업한 공연 팸플릿을 모아 놓은 커다란 상자는 이미 넘쳐나고 있다. 오페라<나비부인>의 쵸쵸상 김영미, 발레 <돈키호테>의 키트리 김주원, 뮤지컬 <캣츠>의 그리쟈벨라 최주희... 내노라 하는 공연, 천의 얼굴이 그의 ‘마이다스의 손’에 의해 창조된다. 그렇지만 정작 그녀의 작업은 철저한 작품 연구와 사전 조사, 고증을 익어가다 마침내 화려한 빛깔을 입고 외출하는 가을 단풍 같은 모습을 지녔다.
그녀 자신이 없는 것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 아니라 내재돼 있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성에 기대어 발견해 나가는 작업, 그 속에는 그 인물을 보여달라는 기도가 깔려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인이기 전에 신앙인이다.
모세와 그 백성의 역경을 담은 <건너가게 하소서>(연출 문고헌)나 극단 말죽거리의 <가마소테 누룽지>(연출 최종률)과 같은 공연에서 구유진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기독연극인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결과였다.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다듬어져 가서일까. 그녀에게선 마흔이 넘는 나이나 경력이 말해 주는 긴 세월동안 연기자들과 함께 인생무대의 축소판을 접하며 살아온 그녀. 구유진의 얼굴에는 천의 얼굴을 다듬는 자에게 먼저 요구되는 인내와 성실이 촉촉하게 배어 있었다.
글 어동번 / 사진 류관희
|
|
CONTENT US
작성자 : sfmake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