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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용섭 태평양 고문의 다섯 딸 (여성조선04,5월호)

작성자 : sfmakeup

작성일 : 2004-11-09 오후 4:47:07

조회수 : [ 3847 ]

첨 부 :

다섯자매 그림이야기.jpg (144 KB)

구용섭 태평양 고문의 다섯 딸

-미술가로 활동하는 다섯 명의 자매가 아버지를 위한 합동 전시회를 열어 애틋한 효심을 과시했다. 태평양 창업 공신 구용섭 씨의 딸들인 매화, 지연, 여혜,
순원, 유진씨 자매가 바로 그들. 딸들의 그림을 보고 흐뭇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너무나도 큰행복을 느꼈다는 다섯 명의 딸들이, 전시회장 한켠에서 팔순의 아버지와 일찌감치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애틋한 추억담을 들려주었다.

지난 4월 7일, 서울 관훈동 동덕아트갤러리에서는 특별한 사연의 잔시회가 열렸다. ‘다섯 자매의 그림이야기- 五色五美展’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는, 태평양 구용섭(83) 고문의 다섯 딸들이 아버지를 위해 기획한 것.
뉴욕에서 그래픽디자인너로 활동중인 큰딸 매화(57), 보태니컬(극사실적 식물화) 아티스트 둘때 지연(53), 동양화를 전공한 셋째 여혜(50), 아버지의 회사에서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는 넷째 순원(47), 그리고 분장디자이너로 일하는 막내딸 유진(44)이 바로 이 전시회의 주인공이다. ‘오색오미전’은 다섯 명의 자매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일군 결실을 팔순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자리였다.
“아버지가 에전부터 꽃을 참 좋아하셨어요. 그 영향때문인지, 우리들 모두 꽃을 주제로 한작품을 많이 그리거든요. 이런 영감을 키워 주시고, 평생 우리를 우해 고생하신 아버지를 흐뭇하게 해드릴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다섯 명이 모여서 아버지를 위한 전시회를 열자고 뜻을 모았죠.”
다섯 명의 딸들이 모여 앉기가 무섭게 큰언니 구매화 씨가 밝은 얼굴로 입을 연다. 이 전시회를 위해 미국에서 귀국한 매화 씨는 전시회 준비에 여념 없는 동생들이 대견한 듯 시종일관 흐뭇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다섯 자매들 중 가장 먼저 미술을 시작한 매화 씨는 큰언니답게, 어린시절에는 동생들의 엄한 선생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둘째 지연 씨는 큰언니에게 호되게 혼나고 눈물을 쏙 뺀 기억도 많다고 회상했다.
“언니는 아주 엄한 선생님이었죠. 그런데 사실 선생님이기전에 언니잖아요. 그래서 가끔씩은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불만도 많이 가졌어요. 그럴 정도로 엄격하게 가르쳤거든요.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아요.”
매화 씨는 지연 씨가 밤을 새워가며 그린 첫 그림을 자신의 눙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모두 지워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엄한 언니의 지도 속에 다섯 명의 자매는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능력있는 작가들이 되었다.

=어머니 원피스를 잘라 반바지 만들어 입던 철없던 딸들=
자매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1960년대 즈음에는 예쁜 아동복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어머니인 김계수 여사(작고)는 직접 옷을 만들어 딸들에게 입혔다고. 김 여사는 손재주도 아주 좋아, 옷을 다 만들고 나면 주위 사람들이 예쁘다고 한마디씩 똑같은 옷을 만들어달라는 부탁도 종종 했다고 한다. 언니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여혜 씨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밝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직접 옷을 많이 만들어 주셨어요. 체크무늬 원피스에 병아리 무늬도 넣어주시고, 보라색 투피스, 녹색 투피스 만들어 주신 기억이 나네요. 또 월남치마가 유행할 때, 제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걸 너무 입고 싶어했어요. 그랬더니 밤색 천에 꽃무늬 들어간 월남치마를 만들어주시기도 했어요. 당신이 만든 옷을 딸들이 입고 있으면 아주 흐뭇해하셨고요.”
손재주 좋고, 색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닌 어머니 밑에서 딸들은 자연스럽게 미적 재능을 키워갈 수 있어싸. 그녀는 평소 자매들에게 여자도 한 가지 재주씩은 꼭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갈쳤는데, 옷을 좋아하는 철없는 딸들이 자신이 아끼던 원피스를 잘라 반바지를 만들어 입어도 결코 혼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제가 이것저것 잘라서 붙이고 만들고 그런 것을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평소에 입으시는 한복을 벗어놓고 외출하셨는데, 제가 그걸 다 뜯어서 반바지를 만들어 버렸어요(웃음). 엄마가 돌아오셔서 그걸 보셨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셨게Rdjdy. 그런데 혼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다음부터 재단할 때는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봐’ 하면서 가르쳐주시더라고요. 그게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인데, 당시에는 안 혼났으니까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참 대단하셨던 것 같아요. 만약에 지금 제 딸이, 내 원피스를 잘라서 자기 바지를 만들었다면 저는 도저히 못 참죠(웃음).”
어머니의 고운 원피스를 잘라 자신의 옷을 만들었던 사람은 바로 넷째 순원 씨. 셋째 여헤 씨는 동생이 참 욕심이 많았다고 덧붙이며, 본인이 갖고 있던 스웨터를 동생이 줄여서 혼자 입고 다녔다는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교통사고로 어머니 돌아가신 후,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어린 딸=
아버지가 태평양 창업 공신이지만 미술을 전공하는 다섯 자매와, 세 명의 남자 형제들까지 공부를 시키느라 집안 살림은 항상 빠듯했다는 것이 딸들의 설명. 이들의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서도 불평 한번 없던 지고지순한 아내였다. 자매들은 이런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불행’ 이라는 단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1976년 겨울,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딸들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둘째 지연 씨가 당시의 상황을 지금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1월 2일이었는데, 그날이 저희 외할머니 생신이셧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고속버스를 타고 친정에 가시던 길이었는데, 도중에 교통사고가 났어요. 15명 정도 죽은 대형사고였죠.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다치시고, 막내 동생은 양쪽 다리가 다 부러졌어요. 그때까지 저희는 정말 불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아주 충격이었죠. 또 우리들 생활도 확 바뀔 수밖에 없었고요.‘
당시 큰딸 매화 씨는 이미 결혼해서 첫아이를 임신중이었고, 지연 씨는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둔 상황으로서 이미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지연 씨는 부랴부랴 혼사를 치렀고, 어머니로써의 역할들은 고스란히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셋째 여혜 씨엑 떠넘겨졌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저한테 살림을 좀 맡아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살림하면서 공부하고 동생들 학부형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죠. 동생들 학교가서 상담도 하고, 고3, 중3짜리 동생 과외 선생님도 구해야 하고, 그런 역할을 다 했어요.”
여혜 씨는 당시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나면 작업 시간이 부족해 밤을 새워서야 겨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그런데 당시 교수님들은 여혜 씨가 집에 좋은 작업실이 있기 때문에 항상 집에서 작업을 하는 줄로만 알고, 강의실이 비좁을 때면 친구들을 데리고 가라고 권유하기도 했단다.

=홀로된 아버지, 그를 위한 특별한 전시회=
“딸린 식구가 많았기 때문에 부모님은 항상 절약하면서 사셔야 했어요. 우리 8남매에다 삼촌, 고모들까지 아버지가 책임 지셨거든요.”
비교적 넉넉한 수입이었지만 많은 부양가족 대문에 홀로 속을 끓여야 했던 아버지. 다섯 딸들은 자신들이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고 보니, 이제야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을 하며 자신들을 키웠을지 짐작이 간단다. 딸들에게 미술도구가 필요할 때면 항상 최고급 제품으로만 사다 주셨던 아버지의 고층을 당시에는 몰랐었다는 것이 딸들의 고백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하지만 항상 최선을 다하셨고, 본인께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서 불평 없이 사셨어요. 처음에는 딸들이 미대 가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는 가장 든든한 원군이셨죠. 미술도구도 빘고 좋은 것들만 사주셨거든요.”
딸들은 이처럼 헌신적으로 자신들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서 아주 흐뭇하다고 말한다. 특히 전시회 준비의 주도적 역할을 한 둘째 달 지연 씨는 ‘아버지만 만족하신다면 이 전시회는 100% 성공한 것’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미술이라는 장르는 무슨 박사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과가 눈으로 잘 안보이거든요. 당연히 아버지는 우리들이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지 잘 모르세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런 것들을 보여드리자는 것이죠. 아버지가 스스로 ‘내가 이 애들을 잘 키웠구나’라고 생각해주시면 저희는 만족해요. 이 전시회는 아버지를 위한 것이니까요.”
평생동안 고생하신 아버지가 좀더 건강하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는 다섯 딸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누구보다도 더 행복하셨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중년 여인들의 애틋한 효심이 전시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진행  안은경 기자 <여성조선 2004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