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한 무용학도에서 변신/전예출씨 만나 본격수업/‘배우얼굴은 화폭이며 작품’/오페라·뮤지컬 대작 도맡아/「천의 얼굴로의 여행」 공연/분장한 ‘배우 얼굴’이 주인공/16년작업 결산 의욕의 무대 SA P
그녀는 마술사다.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순식간에 명작 속 「꿈의 주인공」들이 태어난다. 햄릿·파우스트·카르멘, 춘향이·심청이·낙랑공주, 피노키오·앨리스·도로시….
천의 얼굴을 창조하는 손. 그 손을 가진 여자 구유진씨(34)는 16년 경력의 베테랑 분장사다.
구씨에게 분장은 단순한 화장술이 아니다. 창조의 예술이다.
『얼굴에 코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듯 그 코가 높으냐 낮으냐도 중요해요. 또 조명이 코를 정면에서 비추었을 때 어느쪽으로 그림자가 지느냐도 사람의 얼굴을 달라보이게 하죠. 조명에 드러나는 골격이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분장은 작품이 요구하는 한 인물의 성격을 배우의 얼굴에 집약해 표현해내는 작업이지요. 배우의 얼굴이 곧 분장사의 화폭이고 작품인 셈입니다』
그녀는 전도유망한 무용학도였다. 선화예고를 나와 경희대 무용학과에 진학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보자고 시작한 대학연극반 생활이 그녀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어릴적 그림솜씨를 발휘해 동료들의 분장을 도맡은 것. 교수들에게 수도 없이 불려갔다.
『그 허드렛일이 네 전공이냐』며 혼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분장의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녀가 분장과 인연을 맺은 데는 집안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중3때 돌아가신 어머니.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를 자랑하셨다. 그림을 썩 잘 그려서 동네 사랑방에 돌아다니는 화투란 화투는 다 어머니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현재 태평양화학 고문인 구용섭씨(76).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장품공학을 전공한 인물로 태평양화학의 창립멤버다. 그러기에 3남5녀가 모두 그림이나 화장품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구씨의 분장작업은 전예출선생을 만나면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전씨는 TBC와 KBS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분장계의 「대부」. 대학 3학년 때부터 전씨를 쫓아다니며 개인교습을 받았다. 최근들어 급격히 늘어난 분장인력들이 대부분 해외유학파라면 그녀는 토종분장사인 셈이다.
처음엔 무용안무와 분장을 겸업했다. 주위에서 그녀의 안무실력을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장화신은 고양이」 「피노키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보물섬」 등 8편의 어린이 뮤지컬을 안무했다. 뮤지컬 흥행기였던 80년대 중반 구씨는 김창완(음악)·이창기(연출)씨와 함께 「흥행트리오」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가지 일을 병행하기란 힘들었다. 안무를 포기하고 분장에만 전념했다. 하면 할수록 분장은 어려웠다. 제대로 하자면 문화인류학·생태학·의상학·색채학 등 다방면의 공부가 필요한 분야였다.
분장의 비중이 중요한 고전작품일수록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기 때문. 덕분에 그녀는 셰익스피어·괴테 등의 고전문학과 베르디·푸치니·비제 등의 오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섭렵했다.
구씨의 작업은 일단 대본을 받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본을 통해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성격을 대강 파악한 뒤 도서관으로 향한다. 당시의 의상·헤어스타일·유행컬러 등을 속속들이 알아내기 위해서다. 필요에 따라서는 특수분장도 하고 특수가발도 만든다. 오페라 「나비부인」에 등장하는 일본머리 「가부코」는 국내에서 그녀의 솜씨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타고난 눈썰미와 능란한 분장솜씨를 지닌 구씨에겐 일이 끊이지 않는다. 「춘희」 「카르멘」 「나비부인」 「아가씨와 건달들」 「레미제라블」 「넌센스」 「올리버」 등 오페라·뮤지컬쪽의 대작치고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도 그녀의 사전에 「날림」이란 없다. 아기 낳기 하루 전에도 밤샘을 했던 「악바리」 분장사다.
16년간의 분장생활. 재미난 에피소드도 많다. 서울시립가무단이 「양반전」공연을 위해 미국에 갔을 때는 50명이나 되는 배우들의 분장을 혼자서 책임져야 했다. 서로 자기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여배우들은 새벽 6시부터 숙소문을 두드렸다. 고민끝에 50명의 배우를 불러모아 무대위에 일렬로 세웠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치 피아노건반을 훑어가듯 붓질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기억이다.
가발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도 있다. 가발을 쓸 때는 머리카락을 단정히 모으기 위해 먼저 스타킹을 뒤집어쓴다. 그런데 깜박 한눈을 판 사이 한 남자배우가 스타킹만 쓴 채 무대로 나간 것이다. 그야말로 객석은 웃음바다. 그러나 그녀는 낯이 뜨거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배우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얼굴을 깨끗이 씻어버릴 때 분장사는 슬픔을 느낀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이런 분장사의 마음을 모른다.
그녀는 이 슬픔 속에서 기막힌 아이디어를 하나 찾아냈다. 「천의 얼굴로의 여행」. 자신의 대표적인 분장 작품을 모아 퍼포먼스공연을 기획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공연이다. 햄릿·맥베스·돈호세·리골레토 등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극중인물을 선정해 릴레이식으로 명장면을 재연하는 무대다. 다만 이번만큼은 무대 위 주인공이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분장생활 16년을 결산하고 관객들로부터 평가받는 기회입니다. 그동안 배우나 성악가의 연기에 지장을 줄까봐 표현욕구를 절제해 왔는데 이번에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줄 생각이에요』
뭐니뭐니 해도 분장의 매력은 「변신」이다. 100% 완벽한 변신. 슈퍼맨·원더우먼·백설공주로 변해 동화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아이들의 꿈.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또하나의 나」로 분장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어른들의 마음. 구씨가 16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분장의 세계에 빠져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마술봉을 손에 쥔 여자. 어린아이와 같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빚어낼 그녀의 「천가지 얼굴」에는 「변신의 꿈」이 담겨있다.
◎취재수첩/스승이 ‘대부’였으니 저는 ‘대모’ 돼야죠
구유진씨의 결혼스토리. 연극배우이자 극단 「세미」 대표인 최성웅씨(40)가 그녀의 남편. 83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국내 초연에서 해리역을 맡은 최씨를 분장해주며 처음 알게 됐다. 최씨가 끈질기게 구애했다.
『남자의 눈물이 여자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놓을 줄 몰랐어요』. 지금은 9살이 된 아들 경남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다.
스무살에 시작한 분장생활. 어느새 30대 중반의 여인. 그러나 어딜 봐도 「아줌마티」는 나지 않는다. 그녀의 나이를 알게되면 사람들은 혹시 「분장」을 해서 젊게 보이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온다. 구씨의 천연덕스런 대답. 『분장사도 남는게 있어야죠』
20여명의 제자를 둔 구씨의 꿈은 오직 하나뿐이다. 『스승이 「대부」였으니 저는 분장계 「대모」가 되어야지요』 <김윤덕 기자>
경향신문 1996-03-23 25면 () 기획.연재 329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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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sfmake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