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아 1996/5 맨얼굴 배우 ‘천의 얼굴’로 바꾸주는 베테랑 분장사 구유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얼굴’이 되는 무대. 최근 국내 처음으로 마련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분장 퍼포먼스는 한 베테랑 분장사의 악착같은 ‘근성’에 힘입어 결실을 본 것이다. 16년간 ‘사람을 변신시키는 일‘에 몰두해 온 구유진씨는 각 공연 장르를 망라한 60여가지의 개성적인 분장을 선보며 갈채를 받았다. 1백 55cm의 작은 체구에 생머리 소녀같은 모습을 지닌 구유진씨를 보고 사람들은 때로 혀를 내두른다. 줄기찬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다. 분장이라는 무대 뒤 ‘궂은’일을 하면서 그는 숱하게 밤을 새웠다. 심지어 아기 낳 기 하루 전에도 밤샘을 해서 주위로부터 ‘악바리’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런 그가 드디어 ‘겂없이’ 일을벌이고야 말았다. 지난 4월 18,19일 예술의 전당 자 유소극장에서 공연된 그의 분장 발표회는 이색적인 진행으로 눈길을 끌었다. 평면적인 분장쇼를 벗어나 춤과 음악, 연기가 함께하는 역동적인 무대로 꾸민것. 연 극, 뮤지컬, 발레, 오페라, 한국무용 등 공연 전 분야를 망라한 다양한 레퍼토리로 분 장술을 선보였고 분장의 극적 효과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원작에 충실하게 무대를 재연했다. 그동안 그에게서 분장을 받았던 출연자 60여명이 모두 무료로 선뜻 무대에 서주었 지만 그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고 하소연한다. "분장 준비만 해도 바쁜 터에 스폰서 구하러 뛰어다녀야죠, 공연장 대관하랴, 공연 전 단 제작하랴, 정말 정신이 없더군요. 쉽게 생각했던 일이 꼬이기도 하고..., 거의 매 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했어요.” 분장은 실제 배우를 상대로 붓칠을 하는 것 외에도 그 준비 작업이 결코 녹록지 않 다. 배우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특수 분장의 경우엔 얼굴에 씌우는 ‘페이 스피스’를 제작해야 하는데, 그 과정 또한 복잡하고 시간이 적잖이 걸린다. 모델 얼 굴 모양을 일일이 떠서 찰흙, 석고, 라텍스 순으로 형태를 만들어간 후 색을 칠해야 하는 것. 더욱이 이번엔 리허설용까지 해서 페이스 피스 2백여개를 만들어야 했으니 공연 당일날 하는 분장보다 숨은 사전 준비가 몇곱은 부담이 됐던 셈이다.
극단 대표인 남편도 분장을 인연으로 만나..
구씨의 분장생활은 올해로 16년을 맞았다. 대학 신입생 시절(경희대 무용과) 조용 한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꿔보려고 학교 연극반에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분장의 재미 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있는 학과 무용 레슨과 연극 연습 시간이 겹쳐 배우 로 무대에 서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분장 스태프로 자신매김을 했던 것이다. “혼자서 분장책을 사다가 공부했기 때문에 실수도 많았어요. 책에서 설명해놓은 대 로 화학약품을 섞다가 지벵 불낼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밤마다 두 살 아 래 남동생을 모델 삼아 새로운 것을 연구해보곤 했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됐죠. ‘맛 있는 거 사주겠다’고 꼬셔서는 수염도 붙여봤다, 상초도 연출해보고, 얼굴을 찌그러뜨 리기도 하고.” 그의 독학 실력은 연극반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아 당시 그는 대학생 으로 기성 극단에 불려다녔다. 하지만 곧 스스로 깨치는데한계를 느껴 개그맨으로 활 동했던 형부 송영길씨의 소개로 82년부터는 우리 나라 분장의 대부격인 전예출씨에 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 <레미제라블><아가씨와 건달들><라트라비아타>등 오페라, 뮤지컬의 대작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극단 세미 대표인 남편 최성웅씨도 <아가씨와 건달들>초연때 배우와 분장사로 만 났다. 각자가 하는 일을 서로 뻔히 아는지라 이해의 폭은 넓지만 둘다 너무 바쁜게 흠이라고. “귀가가 늦다고 잔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아무리 늦어도 남편이 저보다 일찍 들어와 있을 때가 없거든요. 친구 너무 좋아하고 개인생 활이 없다고 연애시절 제가 핀잔 준적이 많은데 그 사람 습성이 어디 가나요.” 연극배우는 생활이 불안정하다고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교제기간 구씨 마음이 잠시 흔들린 적이 있었지만, 그만 남편의 ‘눈물’에 넘어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고 한다. 남편의 단점을 50가지도 넘게 열거하며 “헤어지자”는 구씨에 게 남편이 “성격을 고쳐보겠다”며 눈물로 호소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며 펄 쩍 뛴다고 한다. “부모가 바깥에서 살다시피 하니 아이만 불쌍하죠. 아들 경남이는 시어머니께서 봐 주고 계세요. 그런데 전 정말 못됐나봐요. 일할 때는 아이가 보고 싶다거나 미안하단 생각이 전혀 안들거든요. 작년 크리스마스때는 둘다 공연에 매달리느라 선물하는 것 도 깜빡 잊었지 뭐예요. 아이가 ‘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안왔다’고 그러기에, 미안해 서 ‘너, 착한 일을 안했나보지’하고 슬쩍 넘겼지요. 아이에겐 가슴을 터놓고 친구같은 입장에서 얘기하려고 노력해요.” 구씨는 분장의 매력이‘천의얼굴’을 거뜬히 탄생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같은 작품에 임하더라도 분장이 배우의 개성과 어우러져 그때마다 등장인불은 새롭게 창조된다. ‘분장은 단순한 화장술이 아니라 창조의 예술이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도 무대에 서 내려서면 깨끗이 씻겨버리는 슬픔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이 점 을 강조한다. 대학과 문화센터에 출강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부터 분장 연구실 ‘S.F Make up'을 운영해왔다.
글 계수미 / 사진 최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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