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 타이어 1996
천의 얼굴로의 여행... 분장 아티스트 구유진
지난 4월 18일과 19일, 서울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은 한 이벤트를 구경하고 취
재하러 온 이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공연명은 <천의 얼굴로의 여행 - 구유진의 분장
이야기>.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분장퍼포먼스였다. 이날 공연에선 연극 뮤지컬 오
페라는 물론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등 전 장르의 무대예술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진
명장면이 릴레이식으로 재연되었고, 그 대목에서 분장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 등의 설명이 곁들여졌다. 배우가 아니라 분장된 배우의 얼굴이 주인공이 되는 이
색적인 무대인 셈이었다.
무대에 올려진 햄릿, 멕베스, 야수, 돈호세, 리골레토 등은 실제 공연때도 모두 구유
진씨가 분장을 담당했던 작품들. 서울올림픽 계폐회식 등을 비롯 내노라는 공연치고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작품이 없을 만큼 국내 분장계를 이끌어가는 독보적 존재가
바로 그녀다.
“분장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규정하고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합니
다.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는 미적 장식으로서의 가치도 크지요. 그럼에도 인식부족으
로 분장의 독특한 표현세계는 무대에서 소외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분장의 창조적 역할과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막대한 개인경
비를 지출하면서까지 이번 공연을 기획하게 된 동기라고 말한다.
“제가 공연을 기획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맨 땅에 헤딩하는 여자라고 만류
했어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분장이 무엇인지, 또 제대로 된 분장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멀리 지방에서도 관람하러 와주신 분들이 많을 정도로
반응이 좋아 보람이 큽니다.
전공인 무용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미련없이 택할 수 있었던 ‘분장’은 그이에게 단
순한 화장술이 아니다. 치열한 고뇌와 예술혼을 담는 창조의 예술이다. “배우의 얼굴
은 제게 캔버스고 작품이죠. 또 관객들에게는 환상의 즐거움을 주지요. 관객들은 대부
분 잠시나마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 공영장을 찾습니다. 이런 관객들을 환상의 세계
로 인도하는데 분장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이가 분장을 처음 접한 것은 경희대 무용과 1학년 재학시절이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을 바꿔보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에
들어갔던 것. 하지만 무용연습 땐문에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그러면 무대 뒤에
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겠습니다”하고 선배들을 졸라 맡게 된 일이 분장이었다.
무용 때문에 일찍부터 시작한 능숙한 화장솜씨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왠지 분장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화장술과 분장은 엄연히 달랐다.
“분장과 화장을 혼돈하거나 동일시하는 사람이 많은데 분장은 예쁜 얼굴 만들기가
아닙니다. 현란한 조명 아래서 무대장치와 의상과의 조화를 유지하면서 그 인물과 개
성의 창조에 전신투구해야 하는 것이 분장예술이죠. 때문에 분장은 다양한 학문적 배
경을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한 문화 인류학적인 접
근이라든지 배역의 출생지에 따른 생태학적 연구라든지 건강과 연령에 따른 보건학적
인 관찰, 그리고 의학적 견지에서 보는 유전환경 등 고려해야 할 대상이 상당히 넓지
요.”이런 제분야를 독학으로 공부하며 분장실력을 쌓아나갔고 여기에 얹어 타고난 재
능, 집안 분위기도 그이를 도왔다. 구유진씨의 아버지는 현재 태평양화학 고문으로 있
는 구용섭씨.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장품 공학을 전공한 인물로 태평양 화학의 창
립멤버이기도 하다. 중3때 돌아가신 어머니도 그림실력이 빼어났다.
“외할머니는 늘 어머니 자랑을 하셨어요. 그림을 썻 잘 그리셔서 동네 사랑방에 돌
아다니는 화투란 화투는 모두 어머니 작품이었대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
분장에 도움이 되었죠.”
공연때마다 동료들의 분장을 도맡느라 분주했던 그이를 불러 교수들은 “그 허드렛
일이 네 전공이냐, 당장 그만두라”고 야단을 치기도 여러번 했다. 하지만 교수들의 애
정어린 설득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는 이미 분장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분장 작읍은 전예출 선생을 만나면서 개화를 시작한다.
“열심히 하느라 했지만 때로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어요. 요것만 누가 가르쳐주면 좋
을텐데 하는 순간들이 있었지요. 그럴즈음 전예출 선생님을 만났어요. 전선생님은 우
리나라 분장계의 ‘대부’시죠. 선생님으로부터 성격분장 등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어
요.”
최근들어 분장인력들이 급격히 늘어나고는 있지만 제대로 배운 사람이 많지 않은
반면 그이는 13년년간 전예출 선생의 수제자로 실력을 갈고 닦으며 전동성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도 남다르다. 공연히 비교적 한가로운 여름과 겨울엔 틈만나면 프랑스
나 미국으로 날아가 선진 분장술을 배워오기도 했다. 그러나 분장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배워나가는 자세이다. “남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원리, 재료뿐입니다.
나머지는 자기노력으로 찾는 거죠. 수도없이 실패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거쳐야 독특
한 느낌이 살아있는 자기세계를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구유진씨는 분장연구를 위한 시간을 많이 확보하려 애쓴다. 새로운 분장에
관한 의뢰가 들어오면 며칠간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해법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린다
는 그녀의 이러한 지향 때문에 그이는 마음놓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분장 아티스트,
몸사리지 않는 분장 아티스트란 평을 듣고 있다.
또 분장관련 학문인 화학, 계면공학, 피부생리학, 보건학 등을 두루 섭렵하는 등 탄
탄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아티스트로 정평이 나 있다.
안무실력 또한 빼어나 대학을 졸업한 뒤 얼마간은 무용안무와 분장을 겸업했다. 그러
나 88년 결혼후 부터는 그녀는 ‘분장’만을 선택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
신 무대 뒤 그늘에서 외롭고 고된 작읍을 해야 했지만 수많은 얼굴을 아름답게 채색
하는 일에서 무엇보다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년이란 든든한 경력이 쌓인 요즘도 그이는 분장의뢰가 들어오면 먼저 도서관부
터 달려간다. 대본을 통해 읽은 등장인물들의 정확한 고증을 위해서다. 관련 명화나
영화를 찾아보기도 한다. 사실과 고증에 근거한 분장 못지 않게 중시 여기는 것은 느
낌이 살아있는 분장. 분장이 끝나면 주위사람들에게 반드시 “느낌이 어떤가” 묻는 것
을 잊지 않는다. 살아있는 분장을 위해서 속눈썹이 만드는 실루엣까지 고려하는 섬세
함을 가지고 있는 그녀다.
수집한 자료와 감각을 토대로 디자인이 끝나면 여러 각도에서 검증을 마친뒤 연출
자에게 가져간다. 연출가와 분장에 해석이 다를때면 의견을 조율해 수정작업을 하고
그 뒤에도 조명 무대장치 등을 고려해 계속 수정작업이 이루어진다. 작게는 몇 명에
서부터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는 출연자들의 성격분장을 빠듯한 시간에 끝내려면 정신
력과 체력도 필요하다. 분장이란 미적 감각 하나만으로 공략되지 않는 만만치 않은
영역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사전에 ‘대강대강’이란 없다. 출산 하루 전날에
도 밤샘을 하며 일을 했던 근성있는 여자다. 철두철미한 성격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
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분장에 대한 아픈 마음이 숨어있다.
“무대예술에 있어 분장술은 필요불가결한요소죠. 아카데마 영화상에도 메이크업 부
문이 들어있잖아요. 그럼에도 분장에대한 인식이 부족한 건 가슴아픈 일입니다.제가
더 열심히 하므로써 분장분야가 떠맡고 있는 예술성을 알리고 싶어요.”
분장예술이 접대받기에는 아직도 요원한듯한 시대에 살면서도 16년동안 끈질기게
도전해 온 그녀의 탐구심과 행동력은 이땅의 무대예술을 한층 살찌게 하고 있는 동력
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이의 손길을 닿은 작품만도 5백여편. 50명이나 되는 출연배우들의 분장
을 혼자서 도맡았던 작품도 있으니 그가 창조해낸 얼굴은 수천을 헤아린다. TV. CF
등 여타분야에서도 활동을 겸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주된 관심은 무대위의 얼굴에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 자신이 과거 무용수로서의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삶
의 현장이 바로 무대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다. 출연배우들로부터 “분
장 때문에 연기와 성격이 더욱 살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
간인 반면 애써서 분장한 얼굴들을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
져 버릴 때 그녀는 슬픔을 느낁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녀는 분장이 좋다. 자신의 손끝으로 천의얼굴을 잉태시키며 변화무쌍하고
환상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무대의 뒤안길에서 어김없이 타오
르고 있는 그녀의 예술혼. 그이가 창조해낸 무대위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면서 사람들
은 자신속에 감추어진 또다른 모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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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sfmake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