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로의 여행
구유진씨를 만난 곳은 5시간짜리 완창 ‘춘향전’이 올려지는 국립극장 대극장 분장실. “어~, 거 내 맘에 쏙 든다.” 맵시 나게 틀어진 상투를 보며 흡족한 노배우의 칭찬이다. 스무 살 시절 무용수를 꿈꾸었던 그녀가 사람의 얼굴로 무대를 옮긴 지 올해로 18년째. 지금도 아들이 빌려놓은 만화책을 더 열심히 본다는 그녀는 자신의 손끝을 통해 소녀 시절 꿈꾸었던 ‘동화의 주인공’들을 무대 위에 고스란히 재현해 낸다. 햄릿, 오델로, 도로시, 파우스트, 피노키오, 성춘향, 나비부인...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뮤지컬과 연극, 오페라 무대의 얼굴은 한번쯤은 그녀의 손을 거쳐 갔다.
‘셰익스피어의 비국 <오델로>의 이야고를 보자. 우리는 이 인물을 간교한 성격의 소유자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무대분장을 위해 이야고를 수십 번씩 만나 보았지만 한 번도 똑같은 이야고를 접해 본 적이 없다면 과연 믿을까’ 무대 위와 무대 뒤의 막과 막 사이에서 하루에도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는 얼굴을 만들어내는 그녀에게 사람의 얼굴은 풀리지 않는 화두였다.
작업은 대본을 받아 읽는 것부터 시작된다. 대본을 통해 시대적인 배경, 인물의 모습, 성격 등을 대강 파악하면 이와 관련한 자료 수집에 들어간다. 시대극ㅇ나 고전극인 경우 역사, 문화, 복식 등 관련 학문의 철저한 고증이 필수적이다. 다음으로 연출가, 배우와 극에 대한 해석을 내려야 한다. 연출가나 연기자에 따라 같은 연극, 배역이라도 다르게 해석되듯이, 그가 만난 이야고가 수십 명이라는 뜻은 분장 역시 배역에 대한 고정된 스타일을 가지면 안 된다는 뜻일 게다.
따라서 사전에 배우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그가 생각하는 인물의 캐릭터를 충분히 알아두어야 한다. 좋은 분장사는 배우와의 거리를 가장 가깝게 좁힐 수 있는 사람이다. 분장의 테크닉이란? 그건 ‘분장술’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읽는 ‘독심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인물은 강한 인상과 분명한 캐릭터-성서 속의 인물-을 가진 배역이거나,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화 속 주인공들이다. 분장사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해석의 역량에 따라 잘 하고, 못 하고가 분명하게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TV나 CF쪽의 ‘영상분장’이 수입 면에서는 월등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고달픈’ 무대분장의 한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분장은 단연코 ‘창조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영상분장은 매체의 특성상 자연스러움을 보조하는 ‘이쁜이 화장’ , 즉 미(美 )의 추구이지만, 무대 분장은 ‘미’의 추구가 아니라 ‘개성’의 창조가 근본정신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난 후 분장으로 인해 연기와 성격 분석이 분명해 질 수 있었다는 출연진의 한마디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그녀는 2년 전 자신이 만들어낸 무대의 얼굴 1백여 점을 선보이는 <천의 얼굴로의 여행>이란 공연을 기획했다. 단 이틀에 걸친 공연이었지만 ‘분장’의 호과가 작품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인물의 성격을 어떻게 창조해 낼 수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막이 내려지고, 무대 뒤로 돌아온 배우들의 얼굴이 말갛게 씻기는 순간이 가장 가슴이 아프다.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 그녀는 또 다른 천의 얼굴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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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sfmakeup 
